1개월 전

[데이터와 트렌드로 게임 읽기] 모두를 위한 게임, 글로벌 대기업들이 주목하는 '접근성'

'접근성(Accessibility)'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장애가 있는 사람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고, 나이나 성별, 경험이나 지식의 차이로 이용이 제한되지 않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접근성이 높다고 하죠. 보도나 건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올록볼록한 노란색 점자 블록, 엘리베이터 버튼 옆에 붙어있는 점자판, 웹 페이지에 게재된 사진이나 그림의 내용을 설명해 주는 대체 텍스트(Alt Text), 스마트폰 화면의 문자 크기 확대 기능 등이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접근성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짝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영화관이나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외국 영화나 드라마 등을 볼 때 자막을 켜는 것도 접근성의 좋은 예입니다. 외국어를 문제없이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내용을 즐길 수 있게 해 주니까요.

접근성은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에서 점점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로, 비디오 게임도 예외가 아닙니다. 눈으로 화면을 보고, 손으로 키보드와 마우스, 게임 컨트롤러나 조이스틱 또는 스마트폰 등을 조작하여 즐기는 것이 당연시되는 매체인 게임이지만, 시각장애나 색약/색맹 등의 색각이상이 있는 사람이나 한쪽 또는 양쪽 손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사람도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돕는 접근성 기능이 글로벌 대기업을 중심으로 게임에 점점 도입되는 추세입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장애를 가진 게임 이용자의 비중이 상당하며,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게임이나 인기 시리즈 작품일수록 이러한 이용자들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쓴 글 '한 여성, 다양한 정체성의 게임 캐릭터가 늘어나는 이유' 에서 인용한, 네덜란드의 시장조사 전문 기관 뉴주(Newzoo)에서 2022년 4월에 발표한 데이터(링크)에 따르면, 미국 게임 이용자의 31%, 영국 게임 이용자의 21%가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 보유자입니다. 아쉽게도 한국의 게임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자료는 찾을 수 없었지만, '워크래프트 3' 프로 게이머였던 고 박승현님의 사례(링크)를 보면 먼 외국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장애인이 아닌 사람도 접근성 향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편리함과 이득이 크기 때문입니다.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면 장애인들의 지하철 이용도 편해지겠지만, 먼 길을 걸어와서 지친 사람, 발목을 삐어서 일시적으로 걷기가 불편한 사람, 임산부나 노인 등의 다양한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요.

예를 들어 플레이스테이션 5로 출시된 '마블 스파이더맨 2'의 접근성 설정에는 시각장애/색각이상을 지닌 사람을 위한 고대비 강화 항목이 있는데, 이 항목을 켜고 게임 안에서 획득할 수 있는 '스파이더맨 느와르' 슈트로 갈아입으면 마치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에서 묘사된 흑백 만화 속 세상에서 플레이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블 스파이더맨 2' 접근성 설정을 조정해 만든 흑백 만화풍 화면. 출처: 게임 상에서 직접 캡처

'마블 스파이더맨 2' 접근성 설정을 조정해 만든 흑백 만화풍 화면. 출처: 게임 상에서 직접 캡처

 

게임의 접근성 향상은 바로 위에서 소개한 예처럼 그래픽 옵션 추가 같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액션 조작이 어려운 사람들도 게임을 클리어하고 스토리를 즐길 수 있는 난이도 설정을 추가하는 것도, 텍스트로만 진행되던 대화 장면에 음성을 추가하여 시각장애인들도 대화 내용을 더 편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접근성 향상이지요. 특히 후자는 텍스트를 읽고 상상하는 것보다 성우들의 음성 연기를 듣는 쪽이 보다 실감나고 생생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게임이 대화 전부를 음성 더빙해야 한다던가, 누구나 클리어할 수 있는 쉬운 난이도여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음성 연기가 없기 때문에 상상의 재미가 있는 게임도 있고, '다크 소울' 시리즈나 '엘든 링', '세키로'처럼 몇번이고 재도전하는 것이 주된 재미 요소인 게임도 있지요. 이런 게임도 포함해서 게임이라는 매체 전체를 보다 다양한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돕는 시도가, 주로 게임 플랫폼을 보유한 글로벌 대기업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게임 콘솔(*가정용 게임기) 플랫폼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을 보유한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Sony Interactive Entertainment, SIE)에서는 2023년 12월, 플레이스테이션 5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접근성 향상 장치 '액세스 컨트롤러(Access Controller)'를 출시했습니다(링크). 마치 거북이처럼 생긴 이 컨트롤러의 프로젝트명은 레오나르도(Leonardo)였는데(*'거북이'와 '레오나르도' 하면 무언가 떠오르지 않나요?), 사다리꼴, 삼각형 또는 반달형 버튼을 원하는 대로 설정할 수 있고, 3.5mm 단자로 외부 주변기기 키트를 연결해서 발로 밟을 수 있는 페달이나 쉽게 누를 수 있는 커다란 원형 버튼 등을 추가할 수도 있습니다. 포장에도 동그란 고리를 많이 배치해서 손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도 제품을 쉽게 꺼낼 수 있도록 한 배려도 특징이지요.

 

플레이스테이션 5용 액세스 컨트롤러. 출처: PlayStation 공식 홈페이지

플레이스테이션 5용 액세스 컨트롤러. 출처: PlayStation 공식 홈페이지

 

액세스 컨트롤러에 다양한 외부 주변기기 키트를 연결한 모습. 출처: PlayStation 공식 홈페이지

액세스 컨트롤러에 다양한 외부 주변기기 키트를 연결한 모습. 출처: PlayStation 공식 홈페이지

 

액세스 컨트롤러의 포장 박스. 출처: PlayStation 공식 홈페이지

액세스 컨트롤러의 포장 박스. 출처: PlayStation 공식 홈페이지

 

*액세스 컨트롤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궁금하시다면, 한국경제 기사(링크)를 참조해 주세요.

사실 SIE는 접근성 향상 게임 컨트롤러 부문에서는 후발 주자인데요. 게임 콘솔 플랫폼 '엑스박스(Xbox)'를 보유한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MS)는 2018년(미국 기준)에 접근성 향상 장치 '엑스박스 적응형 컨트롤러(Xbox Adaptive Controller)'를 출시했고 현재도 판매 및 지원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생김새는 액세스 컨트롤러와 전혀 다르게 생겼지만, 크고 누르기 쉬운 버튼과 외부 주변기기 키트를 연결할 수 있는 3.5mm 단자라는 구성 요소는 동일합니다. 또한 엑스박스에는 2개의 컨트롤러를 1개처럼 사용할 수 있는 코파일럿(Copilot, 부조종사)이라는 기능이 있는데, 두 손으로 1개의 컨트롤러를 쥐기 힘든 사람이 2개의 컨트롤러를 사용해서 게임을 즐기는 용도로 쓸 수도 있고, 혼자서 진행하기 어려운 부분을 다른 사람이 별개의 컨트롤러로 도와주는 등 다양한 활용이 가능합니다. 또한, 2024년 8월에 독일에서 개최된 게임쇼 '게임스컴(gamescom)'에서는 적응형 컨트롤러에 연결해 사용할 수 있는 적응형 조이스틱과, 손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기존 컨트롤러의 엄지스틱(*Thumbstick, 주로 엄지손가락로 움직이는 아날로그 스틱)에 씌울 수 있는 토퍼(Topper)의 3D 프린터용 파일 제공을 발표하기도 했지요(링크).

 

엑스박스 어댑티브 컨트롤러. 출처: Xbox 공식 홈페이지

엑스박스 적응형 컨트롤러. 출처: Xbox 공식 홈페이지

 

2개의 컨트롤러를 1개처럼 사용하는 엑스박스 코파일럿. 출처: Xbox 공식 홈페이지

2개의 컨트롤러를 1개처럼 사용하는 엑스박스 코파일럿. 출처: Xbox 공식 홈페이지

 

엑스박스 적응형 조이스틱(왼쪽)과 컨트롤러에 엄지스틱 토퍼를 씌운 모습(오른쪽). 출처: Xbox 공식 홈페이지엑스박스 적응형 조이스틱(왼쪽)과 컨트롤러에 엄지스틱 토퍼를 씌운 모습(오른쪽). 출처: Xbox 공식 홈페이지

 

비디오 게임의 접근성 배려는 신체적 장애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스토리 진행 도중 깊은 물속으로 잠수하는 부분이 있는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에는 해양 공포증이 있는 사람을 위해 물속에서 주변의 지형을 확인하기 쉽게 외곽선이 추가되고 스토리 진행에 무관하게 무한정으로 숨을 쉴 수 있는 '해양공포증 완화'라는 옵션이 있고, 몸이 작아진 아이들이 뒷마당의 거미들과 싸우며 생존해야 하는 '그라운디드'에는 거미 공포증이 있는 사람을 위해 게임에서 등장하는 사실적인 생김새의 거미를 동글동글하고 다리가 없는 모습으로 바꾸는 옵션이 있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에서 해양공포증 완화 설정을 껐을 때. 멀리 있는 물속 지형이 흐리게 묘사되어 깊이를 알 수 없다. 출처: 게임 상에서 직접 캡처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에서 해양공포증 완화 설정을 껐을 때. 멀리 있는 물속 지형이 흐리게 묘사되어 깊이를 알 수 없다. 출처: 게임 상에서 직접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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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에서 해양공포증 완화 설정을 켰을 때. 멀리 있는 물속 지형에도 외곽선이 추가되어 그리 깊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출처: 게임 상에서 직접 캡처

 

'그라운디드'의 거미공포증 안심 모드. 최고인 5단계로 설정하면 거미의 다리가 없고 그저 둥근 눈사람같은 모습. 출처: 게임 상에서 직접 캡처

'그라운디드'의 거미공포증 안심 모드. 최고인 5단계로 설정하면 거미의 다리가 없고 그저 둥근 눈사람같은 모습. 출처: 게임 상에서 직접 캡처

 

물론, 이는 서양에서 제작한 게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대전 격투 게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 최신작인 '스트리트 파이터 6'에는 대전 상대와의 거리나 공격 히트 등을 효과음으로 알리는 사운드 접근성 설정이 있고,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권에서 인지도가 있는 퍼즐 게임 '뿌요뿌요'에서는 같은 색을 맞춰서 없애야 하는 '뿌요'의 색을 조정하여 색각이상이 있는 사람도 편하게 플레이할 수 있죠. 비디오 게임 문화의 아이콘이나 다름없는 슈퍼 마리오 최신작인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원더'에서는 적이나 장애물에 부딪혀도 피해를 받지 않는 캐릭터 '요시'와 '톳텐'으로도 플레이가 가능한데, 적이나 장애물을 피하며 진행하는 플레이가 어려운 사람을 위한 넓은 의미의 접근성 기능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뿌요뿌요 테트리스 2'에서 색 조정을 '3색각(기본)'으로 설정했을 때의 뿌요 색상. 출처: 게임 상에서 직접 캡처

'뿌요뿌요 테트리스 2'에서 색 조정을 '3색각(기본)'으로 설정했을 때의 뿌요 색상. 출처: 게임 상에서 직접 캡처

 

'뿌요뿌요 테트리스 2'에서 색 조정을 '3형 2색각'으로 설정했을 때의 뿌요 색상. 출처: 게임 상에서 직접 캡처

'뿌요뿌요 테트리스 2'에서 색 조정을 '3형 2색각'으로 설정했을 때의 뿌요 색상. 출처: 게임 상에서 직접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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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원더'의 요시와 톳텐. 출처: 게임 상에서 직접 캡처

 

슈퍼 마리오 메인 시리즈 뿐만 아니라, 마리오가 등장하는 레이싱 게임 시리즈 '마리오 카트'에서도 접근성에 신경쓴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게임에 등장하는 공격용 아이템 중 거북이 등껍질이 있는데, 직선으로 발사되는 초록 등껍질과 가장 가까운 적에게 유도되는 빨강 등껍질은 색깔만 다르고 모양이 같아 적록색맹인 사람들은 구별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리오 카트 DS' 부터는 초록/빨강 등껍질 아이콘이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게 디자인해서 적록색맹이라도 구별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죠.

 

'마리오 카트' 시리즈의 초록/빨강 등껍질 디자인 변화. 출처: X(구 트위터) 이용자 @CelineMario1

'마리오 카트' 시리즈의 초록/빨강 등껍질 디자인 변화. 출처: X(구 트위터) 이용자 @CelineMario1

 

2014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게임 시상식 '더 게임 어워즈(The Game Awards)'에서도 2020년부터 접근성 혁신상(Innovation in Accessibility)을 매년 시상하고 있는데요. 2023년의 접근성 혁신상은 MS 산하 엑스박스 게임 스튜디오(Xbox Game Studios)의 레이싱 게임 '포르자 모터스포츠'가 받았습니다. 글로벌 게임 업계가 접근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또 하나의 사례로 들 수 있겠네요. 10주년이 되는 2024년 더 게임 어워즈는 미국 시간으로 12월 12일에 개최 예정인데, 올해는 어떤 게임이 접근성 혁신상을 수상하게 될지 기대됩니다.

 

'포르자 모터스포츠'의 접근성 기능 예시 - 게임 내 상황을 설명하는 추가 음성+자막. 출처: 게임 상에서 직접 캡처

'포르자 모터스포츠'의 접근성 기능 예시 - 게임 내 상황을 설명하는 추가 음성+자막. 출처: 게임 상에서 직접 캡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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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 1개월 전
    정말 좋은 칼럼 감사합니다. 유니버설 디자인처럼 게임도 모든 이를 위한 것이 되려면 접근성에 대한 고려를 빈드시 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지요.
  • LEADKUN 글쓴이
    1개월 전
    Locomotion
    과분한 평가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게임 이용자 평균 연령이 점점 올라가고 있기도 하니, 접근성은 이런 부분에서도 고려할만한 요소가 되겠지요.
  • 1개월 전
    한국게임소비자협회에서도 이 화제와 관련해서 진행중인 사업이 있는데 확실히 국내 게이머 중 장애인의 비율에 대한 데이터뿐만 아니라 접근성을 개선하기 위한 실제 개발 사례도 그리 많지 않았어요
    저도 예전에 하던 게임에서 색약 유저를 배려하는 옵션을 넣어달라는 요청이 아주 오랫동안 있었는데도 최근까지 개선되지 않았던 씁쓸한 기억이 있네요 🥲 이런 문제들이 더 가시화돼서 해결될 날이 하루빨리 오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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